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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천원짜리' 때문에 전국 들썩...4
내용 '3천원짜리' 때문에 전국 들썩... 장관 목 날린 이것 4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6.25 전쟁 중에도 왜 커피값은 올라갔을까
이길상(leegs510)

커피 가격이 인상되자 목욕업자와 이발업자들이 반발하였다. 커피 한 잔에 3천 원인데 이발 요금이 4천 원인 것은 형편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고, 결국 커피 가격 인상이 다른 물가 인상의 도화선이 되었다. 물가 상승 뉴스마다 커피는 빠지지 않는 품목으로 등장하였다. 커피 가격 인상이 주는 효과가 매우 큰 시절이었다.

커피 등 생활 물가의 폭등에 대한 책임론이 일자 최순주 재무부 장관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임시수도 부산의 초장동 초입에 있는 남의 집 문간방 하나를 빌려 '홀아범생활'을 하고 있던 장관이 인플레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아내와 1남 3녀 자식들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유학 보내 놓고 홀아범(기러기아빠) 생활을 하던 그였기에 장관 사직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도 예상되었지만 국정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하루아침에 청년 160여 명이 죽는 안전사고가 발생해도, 유치해 놓은 국제 행사 준비 소홀로 국가이미지에 흠집이 나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요즘과 다르다. 책임을 지기는커녕 이전 정부를 비난하고, 자화자찬으로 위기를 넘기려는 요즘 공직자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 70년 전 이 땅의 공직자에게 있었다.

정부는 전쟁 중이던 1953년 2월 17일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고물가에 대응하였다. 100원을 1환으로 조정하는 내용이었다. 물가는 일시적으로 안정되는 듯하였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커피 한 잔 가격을 30환으로 고시하였지만 곧 시작된 여름과 함께 얼음 음료의 수요 증가로 가격이 무너졌다. 다방에 따라 얼음 한두 조각 넣고 커피 한 잔에 60환까지 받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단속하려 하자, 서울 시내 2백여 다방 업자들은 불매운동, 즉 커피를 팔지 않겠다는 협박으로 맞섰다. 단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전쟁 중인데 커피 가격은 왜 이렇게 올랐을까? 물론 원재료인 커피 원두의 절대적 부족도 요인이었지만, 더 큰 요인은 커피 수요의 증가였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별다른 커피 애호 분위기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당시에는 '문화인'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한 독자의 질문에 <경향신문>은 "과학, 예술 및 도덕적 정조를 혼합한 인간 생활, 환언하면 진화된 학술문화의 진보 및 발전에 뜻을 두고 이의 향상을 기도하는 동시에 이 속에서 호흡 생활하는 층"을 문화인이라고 규정한 후, "우리나라에는 자칭 문화인이 많고, 연기 자욱한 다방에서 커피-를 꼭 마셔야 한다는 층에 '사이비문화인'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고 응답했다.

이 신문은 흥미롭게도 자신들이 계산한 당시 문화인 총 숫자가 132만 5328명이라고 보도하였다. 132만여 명의 문화인층에 속하려면 다방에서 커피를 마셔야 했다.
1952년 여름 핀란드 헬싱키올림픽에 국가대표 승마선수로 출전하였던 민병선은 올림픽 참가 이후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며 승마 대회에 참여하였다. 민병선은 유럽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느낀 감상을 정리하여 <조선일보>에 '구라파순례'라는 제목의 기행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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